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안 사건 (문단 편집) === 공산당의 항일구국 선전 === 홍군은 산서성 내부에서 약탈을 하며 버티려 했지만 옌시산의 공세에 결국 5월 3일 섬서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군사력으로 국민정부와 정면대결이 완전히 불가능함을 인식한 마오쩌둥은 자신과 [[주더]]의 통전으로 5.5 통전이란 것을 보내 장제스에게 1개월 내에 정전화의를 행하여 항일 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청했다. 이는 중국 각지의 항일구국여론을 자신들의 편으로 포섭하고 시간을 벌려는 술책이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2차 양광사변]] 대책을 논하기 위해 7월 10일 개최된 국민당 제5기 2중전회에서 7월 13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이 외교에 대해 품고 있는 최저한도의 선은 영토주권을 완전하게 보호한다는 것이다. (...) 분명히 말해 만일 어느 나라인가 우리의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때야말로 우리의 최후의 희생을 치를 때인 것이다." 즉, 아직까진 일본에게 영토주권이 침해당하는 수준은 아니므로 공산당이 주장하는 일본과의 전면전 요구를 거부하고 초공작전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에 공산당은 8월 25일 반장, 반국민당 슬로건을 철회하고 <중국국민당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다. >"장 위원장의 보고는 귀당 5대전회의 정책에 새로운 해석을 첨가시켰다. 즉,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영토주권을 침해한다면 결코 용인하지 않겠으며 우리의 최후의 희생을 치르겠다고 토로하였다. 장위원장의 이러한 해석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국 인민은 어떠한 때가 비로소 '평화 포기의 때'라 할 수 있는지, 또 어떠한 때가 '희생의 최후의 관두'인지를 이제까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 위원장의 이러한 해석이 과거에 비해 약간 진보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보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른바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의 정책 전환이었다. 그간 장제스를 부르던 호칭도 장제스에서 5.5통전에서 장제스 씨로, 여기선 장 위원장으로 승격하고 국민당도 '귀당'이라 부르는 등 공산당은 명백히 장제스에 대한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여기에 [[저우언라이]]와 [[코민테른]] 대표 반한년을 난징으로 보내 국민당과 접촉했다. 천리푸는 공산당과의 화해에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삼민주의]]를 순봉한다. 2. 장 위원장의 지휘에 복종한다. 3. [[홍군]]을 해산하여 국군에 편입한다. 4. 소비에트를 해산하고 지방정부로 개편한다.|| 하지만 소비에트 해산이나 홍군 해산 등은 공산당으로서 명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고 이후 공산당은 중국의 중간파를 포섭하여 국민정부를 흔들려는 방책에 집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